콜로세움에 모인 로마 시민은 ‘찝찝한’ 새 황제 코모두스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기획한 ‘자마 전투’의 재연에서 ‘한니발의 야만군대’를 이끌고 스키피오의 로마군단을 쳐부순 우두머리가 다름 아닌 로마의 위대한 장군이었던 막시무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마 시민은 막시무스에게 열광한다. 스키피오 로마군단의 전멸이라는 ‘라이브 콘서트’의 ‘공연 참사’에도 아랑곳 않는다. 그날로부터 로마에 ‘막시무스 열풍’이 몰아친다. 노예검투사 막시무스가 검투경기에서 그들의 황제 코모두스를 조롱하고 무참하게 죽여버리는 꼭두각시 놀음까지 거리에서 벌어진다. 당황한 코모두스는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진다. 막시무스에게 열광하는 시민들에 섭섭하다 못해 분노하고, 막시무스의 등장으로 뭔가 변화를 기대하고 술렁이는 원로원도 괘씸하다. 더욱이 한때 막시무스의 연인이었던 사랑하는 누이 루실라도 코모두스를 미치게 한다. 실망, 분노, 증오, 질투가 뒤범벅이 돼 코모두스를 짓누른다. 황제의 공연기획 자문위원 카시우스가 또 한번 묘책을 올린다. 막시무스를 역사상 유일무이한 무패의 기록으로 은퇴한 최강의 검투사 티그리스와 대결시켜 로마 시민 앞에서 정당하게 제거하자는 게 묘책의 골자다. 만약의 경우
로마의 전쟁 영웅 막시무스는 코모두스의 계략에 빠져 처형당하기 직전 극적으로 탈출한다. 어깨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가족이 있는 스페인 고향집까지 말을 몰아 달려간다. 지금으로 치면 오스트리아 어디쯤에서 스페인까지 말 타고 달려간 셈이니 대단하기는 하다. 하지만 고향집은 막시무스를 절망에 빠뜨린다. 불행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아내와 어린 아들은 이미 코모두스가 보낸 군인들에게 살해됐다. 아무리 미워도 가족은 건드리는 게 아니다. 코모두스는 선을 넘었다. 이제는 갈 데까지 갈 수밖에 없게 됐다. 아내와 아들을 묻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난 막시무스는 얼마 못 가 황야에서 탈진해 쓰러지고 만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노예사냥꾼 무리가 막시무스를 발견해 ‘주워’간다. 거의 숨만 붙어있는 상태였지만 노예사냥꾼들은 놀라운 ‘선구안’으로 치료만 잘하면 쓸 만한 ‘검투노예’가 될 재목임을 알아챈다. 노예사냥꾼에게 사냥당해 끌려가던 주바(Juba)는 썩어가는 막시무스의 상처에 ‘구더기 치료’를 해준다. 구더기는 모양새가 고약하긴 하지만 고름만 빨아먹고 항생물질을 분비해주는 신통한 벌레라고 한다. ‘구더기 치료’는 19세기 유럽에서 개발돼 미국 남북전쟁 당시 수많은 생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한 ‘글래디에이터’는 재미와 흥미를 위해 역사적 사실에서 상당 부분 일탈해 있다. 하지만 ‘미장센(mise-en-scene)’ 역시 의도적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왜곡이라기보다는 보정(補正)에 가깝다. ‘글래디에이터’를 제작할 때 자문역으로 참여했던 로마사를 전공한 다수의 역사학자는 ‘미장센’ 문제 때문에 중간에 자문역을 내던지거나, ‘엔딩 크레딧’에 본인 이름이 오르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게 아니었다는 건 흥미롭다. 로마사 전공 역사학자들은 코모두스 황제가 아버지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목을 졸라 죽였다는 역사 왜곡은 눈감아줄 순 있어도 장면 구성의 왜곡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스콧 감독과 역사학자들이 부닥쳤던 ‘미장센’의 문제는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는 검투사 시합의 ‘사실성’이었다고 한다. 검투사들의 무기나 복장은 철저히 고증을 따랐지만 문제가 된 지점은 검투사들이 경기장에 광고판을 들고 입장했다는 역사적 사실의 채택 여부였다. 로마시대 검투시합에서 검투사들이 경기가 시작되기에 앞서 요즘의 ‘샌드위치맨’처럼 몸에 광고판을 메거나 들고 관중석을 돌았던 건 로마시대 기록과 프레스코
코모두스는 게르만족과 대치 중인 전선의 군막(軍幕)에서 아버지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교살하고 황제 자리에 올라 로마에 입성한다. 아버지를 죽인 코모두스의 로마 입성 행진은 화려하고 장엄하기 그지없다. 유럽정복에 나선 히틀러가 베를린 개선행진 행사의 모델로 사용했다는 그 유명한 장면을 천재 감독 리들리 스콧이 재현해준다.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 자리를 찬탈한 코모두스는 로마에 장엄하게 들어온다. 그 장엄함은 아버지를 죽이고 돌아온 코모두스가 지구 끝까지 정복하고 돌아온 개선행진인 줄 착각할 정도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다. 로마 시민들이나 원로원 모두 뭔가 석연치 않고 찝찝해한다.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 의원들의 냉랭함에 코모두스는 뻘쭘하고 불안하다. 정통성을 의심받는 독재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드는 카드가 3S 정책(Sportsㆍ ScreenㆍSex)이다. 시민들에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정치보다 더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3S를 제공해 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게 ‘우민화(愚民化) 정책’의 골자다. 가령, 전두환 정권도 기획했던 3S의 원형은 포르투갈 독재자 안토니우 살라자르(Antonio Salazar)의 1930~1960년대 독재정치를 떠받쳐
황제이자 아버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살해한 코모두스에 의해 처형되기 직전 극적으로 탈출한 막시무스는 황야에서 정신을 잃는다. 노예상인이 막시무스를 ‘주워’ 북아프리카 검투사 에이전시에 넘긴다. 로마 최고의 장군이었던 막시무스에게 시골 검투경기 정도는 ‘껌’이다. 훈련이나 연습경기도 건너뛰고 곧바로 프로 데뷔한다. 막시무스는 지금의 모로코나 알제리 어디쯤으로 보이는 사막의 장터에 흙으로 지어진 조악한 원형경기장에서 데뷔한다. 노예상인들이 주워오거나 사오거나 사냥해온 노예 검투사들이 서로를 아무 이유 없이 죽고 죽이는 살육극을 기대하는 관중들의 눈빛이 폭력을 갈망하는 ‘욕정’으로 이글거린다. 경기장에는 이미 살육자들이 기괴한 가면과 복장을 하고 어마무시한 무기를 휘두르며 희생양들을 기다리고 있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통로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줄지어 선 검투사들의 모습은 사형 순서를 기다리는 죄수들 같다. 이제 곧 지옥문이 열릴 것이다. 한 선수는 덜덜 떨며 흙바닥에 오줌을 질질 싸고 있다. 인간이 즐거움을 위해서 다른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오줌 싸던 선수는 문이 열리자마자 철퇴에 맞아 죽는다. 차례차례 배가 갈라지고, 목이 잘리고, 머리
명장(名匠) 리들리 스콧이 만든 ‘글래디에이터(Gladidatorㆍ2000)’는 명장의 작품다운 명품이다. 그해 아카데미 영화상 12개 부문 후보에 올라 남우주연상, 작품상을 포함한 5개 부문을 휩쓸어버린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오로지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건 아니다. 뛰어난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는 항상 조심스럽다. 뛰어난 이야기꾼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허구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그럴듯하게 버무리는 재주를 지녔다. 사기꾼의 자질이기도 하다. 분명히 이어붙였는데 그 자국이 잘 보이지 않는다. 실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이다.[※참고: 선녀(仙女)의 옷에는 바느질한 자리가 없다는 것으로, 성격이나 언동 등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의미.] 영화의 ‘스토리’는 이렇다. AD 180년께, ‘망조’가 깃들기 시작하는 로마제국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게르만 원정에 나서 막시무스 장군을 앞세워 승리를 거둔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아들(코모두스)이 아닌 충직한 장군 막시무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려 한다. 분노한 코모두스는 아버지를 목 졸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당연히 막시무스 일가족을 몰살시키려 한다. 아내와 아들은 무
▲ 인생이 늘 내 맘 같지는 않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자기 길을 가고 볼 일이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전성기가 훌쩍 지난 릭 달튼은 끝내 퇴물의 마지막 행로인 이탈리아 ‘스파게티 서부극’에 출연한다. 그곳에서 지금 할리우드에선 받기 힘든 돈을 받고 결혼도 한다. 영화를 찍은 그는 친구이자 집사인 ‘스턴트맨’ 클리프를 해고한다. 그 무렵, 불행인지 행운인지 히피족들이 쳐들어온다.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한때 잘나갔지만 어느새 배우로서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오르막길은 한 걸음 한 걸음이 힘들지만 내리막길은 청룡열차처럼 정신없다. 달튼은 할리우드의 한 레스토랑에서 감독이자 ‘배우 중개업자’인 마빈 슈워츠를 만난다. 정리해고를 예감한 직장인이 헤드헌터를 만나 탈출구를 모색하는 장면이다. 혹시라도 우연치 않게 자신의 옆집으로 이사 온 스타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에라도 다리를 놓아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헤드헌터 슈워츠는 그런 동아줄은 내려주지 않는다. 대신 달튼에게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스파케티 서부극’에 출연하
영화의 스토리 전개 면에서 샤론 테이트의 역할은 의미가 거의 없다. 주인공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옆집에서 로만 폴란스키 감독과 기이한 동거를 하는 할리우드의 촉망받는 여배우일 뿐이다. 그럼에도 샤론의 등장 분량은 영화의 흐름을 끊어먹고 생뚱맞을 만큼 많다. 타란티노 감독이 의도했던 건 뭘까. ▲ 영화 속 샤론 테이트와 히피걸 ‘푸시캣’을 보여주는 장면은 의미하는 바가 많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영화 속에서 샤론 테이트는 1969년 8월 8일 ‘그날’ 히피들에게 습격당한 릭 달튼의 ‘옆집 여자’였을 뿐이다. 하지만 실제론 1969년 ‘그날’ 찰스 맨슨을 추종하는 히피들에게 습격당해 밧줄로 목이 졸리고 온몸을 난자당해 죽은 여배우다. 영화와 실제가 달랐던 건 또 있다. 영화 속에선 히피 4명이 릭 달튼과 클리프(브래드 피트)에게 끔찍하게 죽지만 실제론 샤론 테이트와 4명의 동료들이 끔찍하게 죽어간 사건이었다. 할리우드를 사랑하는 타란티노 감독은 그렇게 끔찍하게 죽어간 샤론 테이트를 추모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참고: 영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소룡은 TV 드라마에서 그가 연기했던 ‘케이토’란 이름으로 불린다. 전성기가 지난 배우 릭 달튼은 한때 잘나갔던 배역 ‘카힐’로 기억된다. 어디 이게 영화 속 이야기만일까. 우리가 기억하는 건 그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역할’일지 모른다. 당신은 이름으로 불리는가 직職으로 불리는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씨’라 통용되는가. ▲ 우리는 상대방을 그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역할’로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장면❶ =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스턴트맨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는 촬영장에서 무료하게 대기하던 중, 자신을 천하무적이라 떠벌리는 당대의 스타 브루스 리(이소룡)를 만난다. 클리프는 그를 ‘Bruce’라 부르지 않고 ‘케이토(Kato)’라고 부른다. 케이토는 당시 TV드라마에서 이소룡이 연기했던 천하무적 배역의 이름이다. 이소룡도
▲ 사이버 세계는 VR(Virtual Reality)의 세계다. 말 그대로 현실과 유사類似(virtual)한 세상이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스턴트맨이자 운전기사로 근근이 살아가는 클리프(브래드 피트)는 어느 날 촬영장에서 당시의 ‘핫’한 스타 이소룡과 만난다. 영화란 가상세계에서 이소룡은 천하무적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이소룡은 ‘알리도 이길 수 있다’며 허세를 떨고, ‘전쟁 영웅’ 클리프와 한판 붙는다. 현실세계에서도 이소룡은 무적이었을까. 릭 달튼과 클리프와 만났을 때 이소룡은 떠오르는 배우였다. 1960년대 인기 미드 ‘그린 호넷(Green Hornet)’에서 도시의 모든 악당을 족집게처럼 찾아내 ‘혼쭐’내주는 히어로 레이드(Reid)의 운전기사이자 이소룡표 쿵푸로 화끈하게 제압하는 일본인 조수 케이토(Kato) 역을 맡아 뜨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영화라는 ‘가상세계’에서 천하무적이라는 자신의 역할에 몰입한 이소룡은 클리프를 비롯한 스턴트맨들 앞에서 자신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문화충돌의 모습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듯하다. 1960년대 미국사회의 혼란기에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사회의 주류문화와 ‘히피’로 대표되는 미국사회의 비주류문화가 충돌한다. 그렇다면 히피의 반대주의(antism)는 1960년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문화충돌의 모습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듯하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패권을 장악한 미국 사회는 자본주의 원칙이 우악스럽게 장악했다. 그 아래에서 과학기술 제일주의, 경쟁에 따른 성과주의와 업적주의, 금전만능주의, 문명을 향한 맹신에 가까운 찬양이 주류문화로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이런 주류문화를 기반으로 사회는 극도로 보수화한다. 1960년대에 이르러 그에 따른 부작용과 반발이 폭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1960년대 미국사회 주류문화에 불만 있는 모든 사람이 ‘히피’라는 빅텐트 속으로 들어오다 보니
‘once upon a time…’이란 문장은 대개 그 옛날의 신화나 전설을 퍼올리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우리 할머니들이 손주들을 무릎에 앉히고 풀어내는 이야기 대부분이 ‘옛날 옛날 한 옛날에…’로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단 이야기가 ‘옛날 옛날 한 옛날’이나 ‘once upon a time’으로 시작하면 ‘이건 구라구나’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역시 그렇다. ▲ 대선을 앞두고 소외된 계층이나 세대의 표심을 잡기 위한 각 대선캠프의 요란한 분석과 대응이 ‘찰스 맨슨 사건’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영화의 배경은 1969년 여름 할리우드에서 발생한 ‘맨슨 패밀리(Manson Family)’라는 광기 어린 범죄집단의 참혹한 살인사건이다. 맨슨 패밀리는 찰스 맨슨(Charles Manson)이란 희대의 이단자가 결성한 집단이다. 영화 속에서